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트남 전쟁/한국군/논란 (문단 편집) ==== 영산사 승려 학살 의혹 ==== [[구수정]]이 영산사 승려들의 1997년 증언을 자세한 검토없이 1999년 한겨례21에 베트남 통신원 자격으로 기고한 사건이 있다. 증인인 푸 승려와 응웬티유엔한의 주장에 의하면 한국군이 승려들을 남녀 구분없이 살해했다는 증언인데...[[http://legacy.h21.hani.co.kr/h21/data/L990426/1p944q0c.html|#]] 해당 사건은 사실 주체가 한국군인지 베트콩인지도 확실하지 않아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911290020920400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9-11-29&officeId=00020&pageNo=4&printNo=14813&publishType=00020|1969년 11월 당시 남베트남에서도 주체가 불분명한 것으로 인식이 돼서 남베트남에서 발표를 보류하였다]], 당시 남베트남 보도에 따르면 승려가 현장을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고 증언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111300020920102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1-11-30&officeId=00020&pageNo=1&printNo=15432&publishType=00020|1971년 11월 남베트남 정부가 생포한 베트콩으로부터 영산사 승려들이 한국군과 남베트남군에게 베트콩 활동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동료 베트콩과 영산사에 들어가 승려들을 살해하고 이것을 한국군에게 뒤집어 씌움으로서 한국과 베트남간의 이간을 획책한 것으로 자백받았다고 베트콩 소행으로 발표하면서 최종 종료가 된 사건이었다.]] 그 후 1972년에도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2091800209204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2-09-18&officeId=00020&pageNo=4&printNo=15680&publishType=00020|駐越韓國軍(주월한국군)의 民間(민간)학살누명]]의 제목으로 이에 대한 기사가 나온 적도 있었지만 그 후 이 사건은 거의 잊혀졌었다. 그러다 1999년에 구수정이 쓴 한겨례21 기사를 통해서 다시 알려졌다. 푸 승려와 응웬티유엔한이 1997년에 증언한 주장: >“따이한 군인들이 먼저 스님들을 향해 총을 쏘았어요. 이어서 살려달라며 달아나는 여자 보살님에게도 총을 쏘았지요. 그리고는 시체를 모두 불태웠어요.” > >유엔한의 증언이다. 당시 겨우 15살이던 그는 두려움에 질려 고함도 지르지 못하고 '''숨어만 있었다'''고 고백한다. > >그때 푸 스님은 주지스님보다 먼저 마을에 내려가 초상집에서 독경을 읽고 있었다. 증언의 대부분은 유엔한을 통해 이뤄졌고, 그 절의 유일한 생존자인 푸 스님은 말이 없다. '''푸 스님이 마을에서 돌아왔을 때 절은 이미 난장판이 돼 있었다.'''[[http://legacy.h21.hani.co.kr/h21/data/L990426/1p944q0c.html|#]] 보면 주체가 정말 한국군인지 모호한 부분있다. 한 사람은 숨어서 제대로 목격하지 못 했고 다른 사람은 당시 현장에 없었다. 그리고 1969년에는 그 사살의 범인들이 과연 한국군인지 불분명해 발표가 보류됐다. * 1969년 당시 논쟁 * 남베트남측 - 최종발표보류 * 꽁루인 신문 - '''주민 여론이 일관적이지 않고 구구각각이고 모호'''함. * 짠다오 신문 - 범인이 한국군이라는 증거도 없고, 베트콩이라는 증거도 없다. 그리고 한국군이라 주장한 '''증인의 증언에 모순점이 있고 말이 앞뒤가 다르다.''' 그리고 실제 한국군 병사들을 대면시켰는데 대면한 군인들은 범인이 아니라는 증언이 나왔다. * 띠엔 뚜엔 신문 - 지방민들은 한국군의 소행으로 인식. 그러나 유일한 증인이 범행의 주체를 한국군이라 인식한 이유는 한국군이 절에 놀러온 과거가 있기 때문. 그러나 '''한국군이라 단정할 증거가 존재하지 않음.''' 유일한 증인은 나이가 들어 식별능력에 문제가 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베트콩이 표창을 받은 일이 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911290020920400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9-11-29&officeId=00020&pageNo=4&printNo=14813&publishType=00020|#]] * 1971년 남베트남 측 최종 발표 : 1971년 11월 남베트남 정부가 생포한 베트콩으로부터 영산사 승려들이 한국군과 남베트남군에게 베트콩 활동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동료 베트콩과 영산사에 들어가 승려들을 살해하고 이것을 한국군에게 뒤집어 씌움으로서 한국과 베트남간의 이간을 획책하였음을 자백받고 베트콩 소행으로 공식 발표.[[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111300020920102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1-11-30&officeId=00020&pageNo=1&printNo=15432&publishType=00020|#]] 이렇게 이 사건은 당시 언론에 공개된 채로 여러모로 주목을 받았던 사건이며 비밀리에 감추어져 있다가 1999년에 [[구수정]]이 특종 발굴하듯이 발견한 사건이 아니다. 남베트남 측 최종 발표 역시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가정하더라도 결국 학살주체가 모호하다. 결론적으로 한국군이 범인이라 단정할 증거는 전혀 없다. 그런데도 [[구수정]]과 한겨례에 의한 대한민국 국군에 대한 섣부른 유죄추정은 문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